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가사키 청국수병 폭동사건 (문단 편집) == 전개 == 단숨에 동북아시아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하게 된 청나라는 당시 최대 경쟁국이던 일본을 상대로 함대를 과시하고자 했다. 1886년 7월, [[정여창]] 제독은 정원과 진원, 순양함 제원(濟源), 위원(威遠), 양위(揚威), 초용(超勇) 등을 이끌고 나가사키, 부산,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방문항해를 계획하였는데 이는 [[거문도 사건]]으로 조선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조선에 대한 열강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북양함대의 위용을 뽐내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는 길림성의 동쪽 국경 문제를 놓고 [[러시아 제국]]과 협상하고 있었는데 이때 러시아와 담판한 오대징 일행을 귀국시키는 목적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기항한 북양함대는 초용과 양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대기시키고 진원, 정원, 제원, 위원 4척만 데리고 1886년 8월 10일, 연료 보급과 선저 수리를 명목으로 나가사키에 입항하였는데 나가사키 시민들은 경악에 휩싸였다. 당시 정세를 다룬 <나가사키현 경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일종의 데모행위였다. 산과 같은 갑철함이 항구 안을 누르고 닻을 내린 형상은,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안겼다.|| 당연히 정여창이 나가사키에 심심해서 입항한 것은 아니었고 정원과 진원의 위용을 과시함으로 러시아, 일본, 조선 전역에 청국의 해군력을 과시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가사키는 오랫동안 콜레라와 이질이 유행하고 있어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었고 이 때문에 분위기가 흉흉하였는데 전염병의 원인으로 외부인들이 지목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마어마한 청국 함대가 입항하자 나가사키 시민들은 공포와 더불어 적개심을 느꼈다. 이어 청나라 장교단이 상륙했으며 400명의 청국수병들이 상륙하였다. 그러던 중 8월 13일 첫번째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물건을 구매하던 청나라 수병이 일본 경찰과 말다툼을 벌이게 되었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 결국 싸움으로 번졌고 일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고 수병 1명이 경상을 입은 것이었다. 본격적인 충돌은 8월 15일 일요일 오후에 벌어졌다. 나가사키 유곽에서 다시 청국 수병들과 일본 경찰이 충돌하였는데 이것이 패싸움으로 번졌는데 문제는 흥분한 나가사키 시민들이 칼을 들고 청국 수병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싸움의 규모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결국 3시간의 난투극 끝에 경찰 사망자 2명, 중경상자 29명이 발생하였으며 청나라 수병 측은 사망자 8명, 중경상자 42명이 발생했다. 이때 나가사키에서는 영국군 군사고문 랭 대령이 나가사키 항을 포격하자고 정여창 제독에게 요청하였다는 소문이 돌아 나가사키 시민들의 공포는 더욱 심해졌다. 청나라와 일본은 모두 상대측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이홍장은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여겼다. 마침 [[위안스카이]]로부터 고종이 [[알렉산드르 3세]]에게 조선에 러시아 함대를 보내 보호를 요청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상태라서 이홍장의 신경은 매우 날카로운 상태였다. 이홍장은 남양수사 제독 오안경에게 순양함 3척을 비롯한 군함 4척을 거느리고 인천에 출동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주일청공사 서승조에게도 정원과 진원의 수리가 끝난대로 조선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청일 양국은 공동으로 조사단을 파견하였으며 북양함대는 2주 간 나가사키에 발이 묶였다가 8월 27일이 되어서야 인천으로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